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소보 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평화 협상의 내용은 문제점이 많았다. 세르비아 군경(軍警)이 코소보 자치주에서 철수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에 세르비아군의 국경감시 임무는 유지하기로 합의를 봤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코소보와 알바니아 사이의 국경선은 여전히 세르비아군이 전담 관리하되 [[유엔 관리 하 코소보|코소보 자치주 내의 치안권은 UN군에게 넘긴다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사실 이 내용은 공습이 시작되기 전 프랑스 '랑부예'에서 열려다 결렬된 최후협상 과정에서 논의됐던 사실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최후협상 막바지에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돌연 세르비아군의 국경감시 임무포기까지 요구하는 바람에 밀로셰비치가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것조차 미국이 일부러 코너로 몬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이 때문에 세르비아 내부에서는 밀로셰비치에 대한 규탄과는 별도로 미국 등 서방권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쁜 편이고, 반대급부로 친러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세르비아 군경의 코소보 학살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외의 의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항목 참조. [[1999년]] 미국 사회 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렉서스와 올리브나무(''The Lexus and the Olive Tree'')》에서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는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발생하지 않는다."라는 [[자본주의]]에 의한 평화 이론을 주장하였는데 이 전쟁은 그 반례로 꼽힌다. [[세르비아]]도 맥도날드가 진출해 있었고 나토 측 폭격으로 일부 세르비아 맥도날드 지점도 파괴당했다. 해당 전쟁으로 인해서 그 지역을 떠난 난민이 많다. 인근의 중립국인 [[스위스]]가 알바니아-코소보에서 이주한 난민들을 많이 받아 주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는 코소보 난민 출신의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제르단 샤치리]]와 [[그라니트 자카]]가 세르비아를 상대로 나란히 골을 넣으며 스위스의 역전승을 이끌고는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쌍두 독수리 세레모니를 펼쳐서 나란히 징계를 받았다. 국민감정을 떠나 스포츠와 정치는 어떻게든 분리가 되어야 페어플레이가 가능하기 때문에 당연한 조치이다. 상황이 전혀 다르지만 기성용이 한일전에서 골 넣고 한 원숭이 세레모니를 일본에서 문제삼은 적이 있었다. 또 세르비아에서 열린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간의 [[유로 2016]] 예선 I조 경기에서, 전반 41분 알바니아계의 코소보 독립 문구가 적힌 깃발이 드론에 달려 경기장에 난입하자, 세르비아 선수가 이를 치우던 중 알바니아 선수들과 충돌이 발생, 세르비아 관중들의 폭행 난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결국 경기를 치를 수 없게 되자, 원인을 제공한 알바니아의 책임을 물어 세르비아에게 3:0 몰수승을 선언한 반면, 경기장 관리 미숙으로 세르비아에게도 승점 3점 삭감, 예선 2경기 홈 무관중 징계를 내리고, 양 팀 모두에게 벌금 10만 유로 징계도 내렸다. 하지만 알바니아가 이에 CAS에 항소하면서 결과는 알바니아의 0:3 몰수승으로 반전되었고, 결국 세르비아는 승점 3점이 또 감점되면서 유로 예선에 참가한 모든 국가 중 제일 먼저 탈락을 확정지었다. 당연히 전쟁의 결과로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고 친미국가 겸 친서방국가가 되었다. 코소보 사람들이 USA나 NATO를 외치거나, 코소보에 주둔하는 나토군이나 미군들에게 커피를 준다거나 꽃을 주는 영상들이 유튜브에 존재하며, 심지어 클린턴의 이름을 딴 도로도 있고 수도인 프리슈티나에 가면 성조기와 유럽 연합기가 걸려져 있을 정도다.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에 가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알바니아에 미군을 진주시키기로 한 것을 기념하여 [[조지 W. 부시]] 대로도 있고 부시 동상이 [[엔베르 호자]] 동상보다 더 크게 제작되어 있기도 하다. 코소보 전쟁은 서구의 지식인 사회를 양분시켰다. 일반적으로 서구가 일으키는 대외전쟁에 비판적인 진보적 지식인들이 예외적으로 코소보 전쟁만은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공습이 시작되고 1년후, 온건 진보파 지식인의 거두로서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였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담론"의 주창자였음에도 모두의 예상을 깨고 NATO의 공습을 지지하여 서구 지식인 사회에 센세이셔널한 충격을 주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당시 NATO의 공습을 '[[인도적 개입]]’이며, 새로운 세계질서 정치의 시작이라고 봤다. 일어날지도 모를 끔찍한 인권 침해 상황을 국제사회가 앞서 막았기 때문이다[[http://berlinreport.com/bbs/board.php?bo_table=germany&wr_id=506&sst=wr_good&sod=asc&sop=and|#]]. [[수전 손택]]과 [[크리스토퍼 히친스]] 역시 당시 진보적 지식인으로서 미국의 [[코소보 전쟁]] 개입과 NATO의 공습을 지지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당시 서구 정치권과 지식인 사회의 담론을 살펴보면 극우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독재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아돌프 히틀러]]로, 대세르비아주의는 [[나치즘]]으로, 고통받는 소수민족 [[알바니아인]]은 [[유대인]]으로, 사태해결을 위한 장기적이고 외교적인 노력은 [[뮌헨 협정]]으로 쉽게 등치되었고 [[인종청소]]라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서구 사회가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겨우 3년전에 끝난 [[보스니아 전쟁]]이 서구의 소극적인 대응 속에서 막대한 희생을 낳았던 점을 돌이켜보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반면, 또 다른 진보파 지식인 [[놈 촘스키]]는 공습이 오히려 발칸 반도의 민족갈등 상황을 악화시켰으며 국제법을 무시한 당시 NATO의 공습은 잘못된 선례로서, 앞으로도 인권침해는 자주 일어날 것인데 그 때마다 외부적인 무력개입을 일삼는다면 국가간 무력행사를 막을 법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고 비판하였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9/03/29/1999032970510.html|#]] 연극 [[관객모독]]으로 유명한 [[페터 한트케]]는 당시 NATO 공습을 반대하고 세르비아와 밀로셰비치에 동정적인 시선을 보냈다는 이유로 이후 수십년간 '[[인종청소]] 옹호자'라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 외에도 당시 나토 공습으로 군인보다 민간인이 대거 희생되었음과 공습의 명분인 [[인종청소]]의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는 이유로 [[반전주의]] 언론이나 시민단체에서는 코소보 전쟁을 줄곧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이다.[[https://m.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193349.html|#]][[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587462.html|#]] 한편 이 전쟁은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러시아]]간 우호적 교류 관계에 금을 내기 시작한 전쟁으로 평가받는다("The Kosovo War became the great divide in the US–Russian relationship."). 본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이제 NATO는 러시아 견제용이 아니라 범유럽적인 안보기구'이기 때문에 NATO의 확장이 러시아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빌 클린턴]]의 꾸준한 설득에 넘어가 NATO와 1997년 협력 및 안보에 관한 기본협정(Founding Act on Mutual Relations, Cooperation and Security)을 체결하면서 NATO의 확장을 용인하였다. 당시 체결한 협정에 따르면 NATO와 러시아는 영구적 합동 본부(Permanent Joint Council)를 운영하면서 상호협의하에 의사결정해야 하고 러시아와 NATO는 공동 군사 훈련도 같이 해야 하고 [[모스크바]]내에 NATO와 군사연락임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고 러시아는 유럽에서의 군사 훈련을 제한하여야 하는 등의 여러 가지 수행사항이 많았다. 이게 제대로 준수되기만 했다면 NATO와 [[러시아]]간 관계도 어느정도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코소보 전쟁으로 인하여 [[러시아]]는, NATO가 NATO 가입국에 위협을 가한 사실이 없는 [[세르비아]]를, 그것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를 폭격함으로써 러시아를 적대한다고 판단하였고 이후 NATO와의 협력관계에 소극적이 되고 만다.[[https://icds.ee/en/clinton-archives-confirm-the-need-for-nato-enlargement/|#]]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